1.
선입견은 고정관념이다. 어떤 대상에 관하여 이미 마음 속으로 품고 있는 정형화한 생각을 선입견 혹은 선입관이라고 한다. 편견은 '공정하지 못함', '한 편에 치우신 생각'이라는 의미를 품는다는 점에서 선입견과는 다르다. 이 둘은 하나의 마음 속에 머물러 서로 겹치기도 하지만, 의미론적으론 서로 다른 영토에 속한다.
가령, 비싼 외제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는 어떤 이쁜 여자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어떤 배나온 중년 아저씨를 우리가 어느 날 어느 거리에서 바라본다면, 그 여자와 남자는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이 만든 거대한 덫에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다.
2.
우리는 이미 98%쯤은 결정된 존재다. 우리는 선입견의 포로다. 이건 거의 확정적이다. 어떤 A라는 사람을 B라는 사람과 달리 평가할 수 있는, 다르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거의 모든 요소는 A 혹은 B와는 상관없이 이미 결정된 것들이다.
그들이 태어난 나라, 그들의 피부색, 그들이 태어난 시기, 그들이 자라온 곳, 그들의 부모와 형제, 그들이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지능과 체력. 그들의 눈동자와 눈썹, 머리카락. 이건 그들(A와 B)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선택할 수 없고, 그들의 의지와 실천으로 하나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의느님이라면? 아, 의느님이야말로 창조주시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이 좆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알아? 나는 무슨 원빈처럼 안 생기고 싶어서 이렇게 생긴 줄 알아?
3.
이렇게 선입견의 포로에 불과한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그렇지만 기적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했다. 그리고 상상한다. 나는 나 아니라니깐. 그 자기 부정은 자기를 둘러싼 결정된 것들을 깨뜨린다. 나는 나 아니고, 우리 부모는 우리 부모가 아니고, 내 형제자매는 내 형제자매가 아니다. 나는 사실은 저 부자집의 숨겨진 자식 혹은 외계에서 온 수퍼히어로일거야. 그 거짓말을 사람들은 소설, 이야기, 픽션이라고 부른다.
바슐라르는 소설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나 아닌데, 정말 이상하게도 나이어서, 나는 나 아닌 것들을 상상하고, 그 상상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들의 나라에서 나는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바슐라르는 그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순간들을 성서 속 인물인 '요나'에 비유해 소설의 기원을 '요나 컴플렉스'로 설명한다.
4.
누군가과 존재와 존재로서 만난다는 건 그래서 불가능하다. 그 존재를 전인격적인 실존이라고 말한다면 만남의 불가능성 역시 확정적이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우리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이미 결정된 존재들이고, 그렇게 이미 거의 전부가 이미 만들어져서 온갖 선입견의 덫들에 걸려 버린 불쌍한 짐승에 불과하다.
5.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가 진실로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한 전인격적인 존재로서 만날 수 있는 건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다. 불을 끄고,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그 눈동자를 그 피부색을 그 머리카락과 그 성별을 그 목소리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곳. 그 곳에서 우리는 겨우 겨우 스스로의 존재에 관해 조금은 솔직하게 그 선입견의 그물로부터 벗어나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6.
그런 완벽한 어둠에 가장 가까운 '요나의 바다', 미디어적으로 그 요나의 바다에 가장 가까운 게 블로그였다. 선입견 가득한 존재가 스스로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실현 가능한 공간은 인터넷이었으니까. 거기에선 누구나 쉽게 하나의 새로운 이름(아이디)를 통해 전자전기신호들을 공평하게 부여받을 수 있었으니까. 블로그의 익명성은 그래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요나들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익명의 깊은 어둠 속에서야말로 우리는 자기 존재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7.
물론 여기에는 언어적인 한계가 자리한다. 그리고 언어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면서, 그 자체로 토대이므로(상부구조가 아니라), 한 존재를 다시 규정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런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20세기 말에 남한에서 태어난 인간이라는 동물이 그 동물성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인터넷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월드와이드웹, 특히 협의의 미디어로서 블로그였다.
8.
블로그라는 요나의 바다에서 우리는 새로 태어났다. 하지만 비극적으로 그 시기는 짧았다. 그 안에서도 다시 계급이 생겨나고, 또 다시 장사꾼의 호객행위가 생겨났으며, 병신 같은 일등놀이가 태어났다. 그건 인간이라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고, 동시에 희극적인 존재가 스스로의 불안과 한계를 잊는 방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건 참 자기연민에 빠지게 하는 인간의 속성이긴 하다. 참으로, 참으로 안쓰럽도다.
9.
글이 인격을 반영한다면, 동시에 그 인격의 기만 역시 반영한다. 글이 진실을 반영한다면, 그 진실이 숨어 있는 거짓 역시 반영한다. 사람들은 흔히 익명성을 거짓, 어둠, 투명하지 못한 어떤 것의 이미지로 떠올린다. 그건 마치 현실 속의 대한민국이라는 껍데기, 그 표시, 그 투명함, 그 물질성이 갖는 기만과 거짓의 알리바이 같다.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와 경제와 권력의 거짓은 익명의 가치를 불길하고, 음산하며, 타락한 존재의 조건으로 이미지화했다(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본능에 가까운 욕망으로 언술화했다).
0.
얼굴. 내가 원래 말하고 싶었던 건 얼굴이다. 얼굴만큼 기만적인 선입견의 도구는 없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얼굴로 태어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런데 위대한 대한민국은 가면(익명성)을 거짓으로 선포한다. 얼굴이야 말로 거짓이다. 이건 정말 확정적으로 자명하다.
from 민노씨.네 http://minoci.net/1370
선입견은 고정관념이다. 어떤 대상에 관하여 이미 마음 속으로 품고 있는 정형화한 생각을 선입견 혹은 선입관이라고 한다. 편견은 '공정하지 못함', '한 편에 치우신 생각'이라는 의미를 품는다는 점에서 선입견과는 다르다. 이 둘은 하나의 마음 속에 머물러 서로 겹치기도 하지만, 의미론적으론 서로 다른 영토에 속한다.
가령, 비싼 외제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는 어떤 이쁜 여자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어떤 배나온 중년 아저씨를 우리가 어느 날 어느 거리에서 바라본다면, 그 여자와 남자는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이 만든 거대한 덫에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다.
2.
우리는 이미 98%쯤은 결정된 존재다. 우리는 선입견의 포로다. 이건 거의 확정적이다. 어떤 A라는 사람을 B라는 사람과 달리 평가할 수 있는, 다르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거의 모든 요소는 A 혹은 B와는 상관없이 이미 결정된 것들이다.
그들이 태어난 나라, 그들의 피부색, 그들이 태어난 시기, 그들이 자라온 곳, 그들의 부모와 형제, 그들이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지능과 체력. 그들의 눈동자와 눈썹, 머리카락. 이건 그들(A와 B)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선택할 수 없고, 그들의 의지와 실천으로 하나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의느님이라면? 아, 의느님이야말로 창조주시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이 좆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알아? 나는 무슨 원빈처럼 안 생기고 싶어서 이렇게 생긴 줄 알아?
3.
이렇게 선입견의 포로에 불과한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그렇지만 기적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했다. 그리고 상상한다. 나는 나 아니라니깐. 그 자기 부정은 자기를 둘러싼 결정된 것들을 깨뜨린다. 나는 나 아니고, 우리 부모는 우리 부모가 아니고, 내 형제자매는 내 형제자매가 아니다. 나는 사실은 저 부자집의 숨겨진 자식 혹은 외계에서 온 수퍼히어로일거야. 그 거짓말을 사람들은 소설, 이야기, 픽션이라고 부른다.
바슐라르는 소설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나 아닌데, 정말 이상하게도 나이어서, 나는 나 아닌 것들을 상상하고, 그 상상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들의 나라에서 나는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바슐라르는 그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순간들을 성서 속 인물인 '요나'에 비유해 소설의 기원을 '요나 컴플렉스'로 설명한다.
4.
누군가과 존재와 존재로서 만난다는 건 그래서 불가능하다. 그 존재를 전인격적인 실존이라고 말한다면 만남의 불가능성 역시 확정적이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우리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이미 결정된 존재들이고, 그렇게 이미 거의 전부가 이미 만들어져서 온갖 선입견의 덫들에 걸려 버린 불쌍한 짐승에 불과하다.
5.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가 진실로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한 전인격적인 존재로서 만날 수 있는 건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다. 불을 끄고,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그 눈동자를 그 피부색을 그 머리카락과 그 성별을 그 목소리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곳. 그 곳에서 우리는 겨우 겨우 스스로의 존재에 관해 조금은 솔직하게 그 선입견의 그물로부터 벗어나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6.
그런 완벽한 어둠에 가장 가까운 '요나의 바다', 미디어적으로 그 요나의 바다에 가장 가까운 게 블로그였다. 선입견 가득한 존재가 스스로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실현 가능한 공간은 인터넷이었으니까. 거기에선 누구나 쉽게 하나의 새로운 이름(아이디)를 통해 전자전기신호들을 공평하게 부여받을 수 있었으니까. 블로그의 익명성은 그래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요나들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익명의 깊은 어둠 속에서야말로 우리는 자기 존재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7.
물론 여기에는 언어적인 한계가 자리한다. 그리고 언어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면서, 그 자체로 토대이므로(상부구조가 아니라), 한 존재를 다시 규정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런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20세기 말에 남한에서 태어난 인간이라는 동물이 그 동물성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인터넷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월드와이드웹, 특히 협의의 미디어로서 블로그였다.
8.
블로그라는 요나의 바다에서 우리는 새로 태어났다. 하지만 비극적으로 그 시기는 짧았다. 그 안에서도 다시 계급이 생겨나고, 또 다시 장사꾼의 호객행위가 생겨났으며, 병신 같은 일등놀이가 태어났다. 그건 인간이라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고, 동시에 희극적인 존재가 스스로의 불안과 한계를 잊는 방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건 참 자기연민에 빠지게 하는 인간의 속성이긴 하다. 참으로, 참으로 안쓰럽도다.
9.
글이 인격을 반영한다면, 동시에 그 인격의 기만 역시 반영한다. 글이 진실을 반영한다면, 그 진실이 숨어 있는 거짓 역시 반영한다. 사람들은 흔히 익명성을 거짓, 어둠, 투명하지 못한 어떤 것의 이미지로 떠올린다. 그건 마치 현실 속의 대한민국이라는 껍데기, 그 표시, 그 투명함, 그 물질성이 갖는 기만과 거짓의 알리바이 같다.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와 경제와 권력의 거짓은 익명의 가치를 불길하고, 음산하며, 타락한 존재의 조건으로 이미지화했다(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본능에 가까운 욕망으로 언술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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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내가 원래 말하고 싶었던 건 얼굴이다. 얼굴만큼 기만적인 선입견의 도구는 없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얼굴로 태어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런데 위대한 대한민국은 가면(익명성)을 거짓으로 선포한다. 얼굴이야 말로 거짓이다. 이건 정말 확정적으로 자명하다.
from 민노씨.네 http://minoci.net/13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