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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3일 월요일

그냥 다 죽어버리면 좋겠어

0. 한쪽에선 정의를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예의를 말한다.

1. 한쪽에선 죽음으로 도피했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죽음으로 사죄했다고 말한다.

2. 한쪽에선 고소인의 고통을 보라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자신이 지은 죄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자기 자신에게 집행한 불완전한 인간을 보라고 말한다.

3. 한쪽에선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한 연약한 존재를 억눌렀던 위선적 권력의 일방적인 욕망과 탐욕이 만들어낸 고통을 보라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그 모든 고통은 그 고통을 만들어낸 자가 스스로 처단한 생명으로, 그 죽음으로 넉넉하게 보상받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4. 한쪽에선 사실을 규명하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생명이 줄 수 있는 마지막 참회, 죽음으로 이미 사실을 뛰어 넘는 진실이 성취됐다고 말한다.

5. 한쪽에선 죽음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죽음은 이미 모든 것을 말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가 살아 돌아오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죽음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가 죽음으로 걸어들어간 그 시간을 함께 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그 어둠으로 걸어 들어간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그의 죽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했다. 만약에  그에게 좀 더 연민을 느낀다면, 그가 스스로 걸어 들어간 그 죽음의 시간을 실시간으로, 간접적으로나마, 함께 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 죽음의 시간을 한 방송사의 특보를 통해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고소인 혹은 피해 호소자의 고통을 상상하는 일은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의 남자들은 물론이고, 적지 않은 여성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내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간접체험했던 그 죽음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어둠고 깊은 고통을 고소인이 체험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을 간접체험하는 사람들은 남성보다는 여성일 테고, 앞으로도 그 고통의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 죽음조차 도피로 규정하면서 망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만 생각할 뿐이다. 다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그저 그 죽음 앞에서 아주 잠시 동안만 침묵할 수는 있지 않을까, 바라볼 뿐이다.

나는 죽음마저도 서로 더 증오하기 위해 도구로 쓰는 이 지옥도를 더는 쳐다볼 자신이 없다.
정말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는 조두순이고, 손정우이며, N번방의 공범들과 별로 다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렇게 상상할 수 있는 조건이나 능력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죄와 벌 사이에는 아주 엄격한 비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 지은 만큼 벌 받아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벌 받은 만큼 용서받을 자격도 생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그건 단지 성인지 감수성의 부족일 뿐이다.
그 어떤 사람들의 말이 나에겐 그냥 논리의 비약이거나 억지인 것처럼.

그러다가 그냥 모두 용서하면 좋을 텐데, 나는 문득 생각한다.
그냥 모두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멍청하고 정의롭지 않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벌어져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건 정의롭지 못한 일이니까.
나도 조두순을 손정우를 N번방의 공범들을 용서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죽어버렸다면, 아마도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그 피해자였다면 혹은 적어도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면.
그건 관념으로 상상하거나 떠올려보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 한 편으로 나는 생각한다.
빌어먹을, 이럴 거면 그냥 다 죽어버리면 좋겠어.
그래, 그냥 다 죽어버리면 좋겠어.

그리고 다 죽어버리기 전에,
조금만 더 서로에게 따뜻하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from 민노씨.네 http://minoci.net/1376

2019년 11월 7일 목요일

집단 자뻑: 웹 2.0과 4차산업혁명 그리고 타다



마치 마약 빠는 것처럼 황홀해져서(물론 나는 마약을 빤 적 없어서 그게 얼마나 뿅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대가 당대에 명명하는 이름들이 있다. '당대'라고 썼지만, 대개 그 '당대'는 당대의 '빅마우스'거나 권력과 자본의 움직임이 '얼굴마담'으로 세운 하수인에 불과하다. 그래서 나는 그 이름들을 대체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이름 붙이는 자'의 전략적인 프레임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웹2.0도 그중 하나다. 웹2.0으로 시대로 불렀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무슨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 같은 비현실감마저 느껴지는 그 시절은 하지만 생각해보면 얼마 지나지 않은 그때다. 그 웹2.0을 대표하는 단어는 공유, 개방, 참여였다. 그 단어는 스스로 도취하게 하고 스스로 자뻑의 연못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하는 나르시서스의 언어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에게 그랬다. 나도 그 자뻑맨 중 하나다. 인생을 망치는 방법은 늘 도처에 널렸다. 나는 그 자뻑이 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를 견디게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자뻑(이라고 생각했던 누군가의 전략적 프레임)이 또 내 인생의 어리섞은 부분을 더 견고하게 했다고도 생각한다. 그래도 거기엔 일말의 양심(?)은 있었다. '엔드유저'. 웹2.0은 어쨌든 엔드유저에 관한 (표면적이고 가식적이나마) 존중이 있었다.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민중적 관점이나 철학이 그래도 코딱지만큼은 남아 있었다. 나에게 그 엔드유저의 철학을 대표하는 건 '블로거' 혹은 '블로그'였다.

'공유경제'에 관한 김영준 님의 지적에 대체로 깊이 공감하고 동의한다. 공유경제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마법의 단어다. 그리고 그 단어와 더불어 또 하나의 마법의 단어가 있다. '4차산업혁명'이라는 단어다(참고하면 좋은 글: https://ift.tt/2oXvGMX).

그 둘의 의미론적 전략 기반은 디지털이 시대의 '상수'가 된 시대에 자본 권력을 확장하고 견고화하기 위한 대중적 위장(기만)을 위한 정경복합체의 레토릭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4차산업혁명이 (대한민국에서는) 귱유경제보다 더 최악인 건 그 기만성에 자본의 순수하기 짝이 없는 그 무지막지한 자기애와 그 자본과 한몸이 되어 연애하고 싶은 정책 관료의 망상이 겹쳐져서 느껴진다는 점이다(참고 하면 좋은 글: https://ift.tt/32sNJIP). 정부에서 4차산업혁명 육성안이라고 하는 것들을 하나만 골라 제대로 살펴보시라. 그게 얼마나 기만적인 수사에 불과한지 담박에 느껴질 거다(참고하면 좋은 글: https://ift.tt/2NuWkGx). 4차산업혁명이라는 걸 무슨 정경복합체의 블루오션처럼 기업인, 정치인과 정책 관료들이 '전가의 보검'처럼 사용하는 모습은 대체로 씁쓸하고 대체로 코믹하다(대개 그냥 유행어 사용하듯 말하지 그게 무슨 의민지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사실 4차산업혁명이라고 말해지는 것들의 본질은, 지금까지 자본이 늘 그래왔듯, 새로운 시대의 지배적인  코드('디지털')에 결합해 어떻게 산업의 구조를 재편하고, 노동의 매커니즘을 재설계하면서 안정적으로 자본을 확장하고 축적하며 다시 확장하느냐에 있지 거기에 인간이나 공동체에 대한 전망이 있거나 '공유'라는 철학(?????????????)이 있거나 '혁명'(????????????????????)이라는 말이 가진 인간 공동체에 대한 진보적 역사관이 있는 건 전혀 아니다. 공유경제의 본질이 '엔드유저'의 자발적인 참여를 얼마나 조직화해서 영속적으로 그들의 참여(노동)를 삥뜯고, 그걸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알고리즘화하는 것이냐에 있다(여기에서 비인간적이라는 말은 인간의 노동이 덜 개입하는 방식으로라는 의미이지 통상의 윤리적 기준에 의한 표현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4차산업혁명의 본질에는 국가가 우리 시대의 새로운 승자로 등장한 디지털 기술 자본과 얼마나 자웅동체로 결합해서 표면적으로는 국가경제의 위상과 규모를, 실질적으로는 극소수 '신이 된 인간'의 권력을 확장하느냐에 있지 거기에 무슨 '파괴적 혁신'의 딜레마(가장 대표적인 건 고용없는 성장)에 관한 진지한 정책적 고민이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기본소득이나 소위 '복지국가'에 관해 집단적인 알러지를 내면화한 나라에서 공유경제나 4차산업혁명의 담론이 기업과 자본의 편에서만 일방적으로 집단 세뇌하는 것마냥 유통되는 건 큰 문제로 생각한다.

참고로 점점 더 고도화하는 디지털 독점 기업의 엔드유저 삥뜯기의 구조화와 이에 상응하는 자본의 극극극소수 집중에 대응하는 정책적 환원 수단이 기본소득이지 기본소득이 무슨 갑툭튀해서 세금을 나눠 먹는 그런 거 아니라는 걸 정말 시장의 할배할매들까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대대적인 정책적 캠페인이 조만간(?)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여기가지.

사족. 타다

나는 타다가 무슨 혁신이나 공유라는 말을 붙여야 하는 대단한 모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우리나라 사정에 부합하는 있을 수 있는 (사용자에게 좋은) 사업 모델로 생각한다. 하지만 타타에 짜증스러운 기존 운수업계 종사자의 마음도 충분히 공감이 되고, 반대로 타다 쪽에서 답답해 하고 화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단순하게 직업 자유의 헌법적 가치로만 이 문제를 바라보거나 '공유경제'나 '4차산업혁명'이라는 아리까리하고 기만적인 수사로 이 문제의 논점에 물타기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열악한 전통 산업과 디지털 관리 기술에 기반한 새로운 서비스의 충돌이고, 그뿐이다. 정책이 개입하려면 무슨 지들도 제대로 모르는 아리까리한 4차산업혁명이니 공유경제니 이런 수사를 뒤집어 쓰고 개입하지 말고, 실제로 이 충돌이 초래하는 이익과 손해의 귀속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정책적으로 '재조정'되어야 하는지에 관해서만 고민하면 된다. (물론 그 안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타다가 공유경제인가? 그에 앞서 공유경제라는 건 도대체 뭔가? (참고하면 좋은 글: https://ift.tt/2NpKCwK)

그 관점에서 검찰의 기소는 타타 입장에서야 황당하고 억울하겠지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기소였다고 생각한다. 박영선 장관이야 자기 부처(중소벤처기업부) 성격이 그러니까 그런 코멘트("검찰이 너무 전통적 사고에 머물러 있지 않았나 생각했다.")를 할 수 있다 치고 그런데 황당한 건 김현미 장관을 위시한 고위 관료들의 뒷북이다. 특히 김현미는 검찰 기소 과정을 뻔히 다 들여다 봤으면서 무슨 이런 뒷북("검찰이 너무 성급하지 않았나 생각")을 치는 건지 모를 일이다.


from 민노씨.네 http://minoci.net/1375

2018년 8월 27일 월요일

독백 (미완성)

'미투'라는 격변의 시대, 혁명의 시대를 사는 진보적 지식인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안희정 1심 판결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세계관, 가치관은 '당대의 법적 판단'의 가치보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보면 더 중대한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안희정 1심 판결에 관해 분노하는 많은 이들을 존경하고, 그 마음에 공감한다.

다만, 판결의 결과는 현재 법 체계의 한계를 반영한 것일 뿐이라고 판단한다. 안희정 판결을 담당한 형사재판부 판사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꼰대라서, 가부장 기득권이라서 이런 판결을 내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형사법의 체계와 이 사건에 드러난 핵심 사실 관계로 미뤄 보건대, 확률적으로 무죄 판결을 내릴 판사가 그렇지 않을 판사보다 더 많다고 여긴다. 그러니 그것은 사람(판사)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형사법)의 문제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은 즉각 폐기되어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 공동체가 자신의 생존과 미래와 가치를 위해 확보해야 할 진보적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러니 촛불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고, 적폐의 연장이므로 안희정 판결과 이 판결을 도출한 형사법의 원칙(특히 형사법에서 입증책임의 문제)이 그 즉시 폐기되어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안희정 유죄, 법원도 유죄'를 외치는 '정의로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우리들'은 누가봐도 정의롭다. 나는 그 뜨거운 심장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내 마음도 당연히 그쪽을 향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안희정에게 무죄를 선고한 그들은 그런 이유로 불의한가. 무죄 판결이 도출될 수밖에 없는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형사사법체계는 불의한가.

'위계/위력 간음'에서 그 위력의 관계만으로 범죄를 의제하고, 그에 관한 반증을 제시해 혐의를 벗는 의무를 피고인에 부여하면 어떻게 될까.

안희정-김지은에 대입해보자. 안희정과 김지은은 그 자체로 '위력'이 인정되는 관계이므로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일단 안희정은 '위계/위력 간음'을 저지른 범죄자가 된다. 그가 그 혐의를 벗으려면 해당 성관계가 '위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반증을 통해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원래 형사법에서 입증책임은 당연히 어떤 자가 죄를 지었다고 공소를 제기하는 검찰에 있다. 주장하는 자가 입증하라. 이 대원칙을 '위계/위력 간음'에서만은 예외로 해야 할까. 그 입증책임을 '현저히' 완화(정확히는 '전환')해도 좋은 걸까. 그 입증책임의 방향을 정반대로 바꿔도 좋은가.

안희정과 같은 거대한 권력자는 충분히 실력(?) 있는 변호인단을 꾸릴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돈 많은 사장님, 대기업 간부, 소위 이런저런 권력자들, 기득권자들도 그럴 테다. 하지만 그런 자들만 피고인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중에 억울한 자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자들에게도 인권은 있다. 인권은 상대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다. 착한 사람에게도 악한 자에게도 모두 동등하게 있는 것. 그게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권리, 인권이다. 형사법(특히 핵심인 죄형법정주의와 무죄추정의원칙)이 괜히 범죄자의 마그나 카르타(권리장전)라는 별칭을 얻는 게 아니다.

검찰은 사법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국민의 막대한 세금을 빨아먹는 거대한 권력기구다. 검사는 국민을 대신해서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는 존재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 피의자의 죄를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세운다. 그리고 그 자가 저지른 죄를 '엄격하게' 입증한다. 그게 원칙이다.

그런데 '위계/위력 간음'이라는 범죄에 관해서만은 그 원칙이 파괴된다. 검찰의 입증책임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화'된다. 검찰은 할 일이 별로 없다. 위력 관계만 인정되면 그 즉시 범죄는 기수가 되므로, 검찰은 피고인의 '반증'에만 대응하면 그뿐이다.

이것은 정의인가. 나는 이것이 국가권력 그 자체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저 거대한 검찰기구에 맞서야 하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현저한 무기평등의 파괴라고 생각한다.

형사 재판은 아무리 진보적으로 고찰해도, 기본에서 한 개인과 거대한 권력적 국가기구(검찰)와의 싸움이다. 그 개인이 천하의 개새끼라고 해도, 엄청난 돈과 권력을 가진 이라고 해도, 그런 예외적인 케이스 때문에 형사법의 체계와 근간을 형성하는 대원칙에 예외를 두고 손쉽게 변경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형사법과 같은 공권력 수단은 항상 그런 공권력으로부터 파괴되었던 '피의 기억'을 가진 시민에게는 '양날의 검'일 수밖에 없다. 그 검은 '좋은 시절'에는 나쁜 놈을 처단할 수도 있지만, '흐린 날'에는 우리 자신을 향하는 추악한 권력의 비수가 될 수도 있다. 다시 현실로 돌아가보자.

안희정을 법적으로 처벌해야 하는가? 처벌할 수 있는가?

1. 그러면 좋겠다. 2. 그럴 수 없다.

안희정 1심 재판의 결론은 (아직은) 2번, "(법적 증명이 부족해) 그럴 수 없다"이다. 정의는 고정된 단단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철학과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설정한 놓은 일시적인 '정치노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자기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자기최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가령, 정의의 반대말인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의 기치는 "정의사회구현"이었다. 물론 절대적인 정의가 있는지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따로 생각해볼 문제지만, 현실에서 정의는 대체로 맥락적이고, 상대적이다. 내 정의가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네 정의는 반드시 틀린 것이 아니라 (대체로) 내 정의가 옳아도 (동시에 상대적으로) 네 정의가 더 (혹은 덜) 정의로운 것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판결문(정확히는 민주신문의 한 기자가 불완전한 형태로 받아적기한 글)을 읽어봐도 판결의 논리를 정면에서 반박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판결의 논리 중에서 크게 문제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은 설명을 부탁). 내가 생각하는 혹은 믿는 정의에 반하므로 판결이 부당하다는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판결 역시 현존하는 '죄형법정주의'와 '형사법의 입증원칙'이라는 정의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증명되지 않은 피의사실을 정의에 관한 주관적인 믿음 때문에 '범죄'로 의제할 수는 없다. 이것은 형사법의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를 폐기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죄형법정주의가 정면에서 폐기된 두 번의 큰 역사가 있다. 히틀러의 독일과 초기 소비에트다.

"건전한 국민 정서에 반하는 행위는 처벌할 수 있다." (독일 형법 2조)

일견 상식적으로 보이는 이 문장은 풀어서 설명하면, 권력이 국민의 '정의'(건전한 국민 정서)를 참칭해 누구나 가두고, 죽일 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국민의 절대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당시엔 믿어졌던 독일 정부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법은, 특히 국민을 가두고, 빼앗고, 죽일 수 있는 형사법은 '좋은 시절'이 아니라 '흐린 날'을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고쳐져야 한다. 그것은 추악한 범죄자를 처벌하지 말자는 아니라, 언젠가 추악한 권력을 만나 우리를 향할 수도 있는 그 '양날의 검'을 대비해야 한다는 전략적인 고려이기도 하다.

나는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내가 믿어지지 않는다. 가진 것도 더럽게 없는데 기득권의 논리만 설파하는 더러운 꼰대 새끼, 그게 나인가. 아마도 정의로운 누군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테다. 나는 그 정의로운 마음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나를 욕하는 정의로운 마음이 흐르고 넘치길 진심으로 원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상관 없이, 내 심장은 어느새 차가워졌다. 내 심장은 회의주의와 패배주의를 만나 초라하게 식어버렸다. 볼품없이 쪼그라졌다. 그런 내가 나도 정말 싫다.

뜨거운 심장은 아름답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심장은 너무 빨리, 너무 쉽게 식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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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0. 기록을 위해 옮긴다. 앞으로 페북에는 가급적 글을 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1. 이 글은 미완성이다. 나는 '안희정 판결'에 대해 분노하는 여성들을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그 노력이 턱 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 글에 대한, 내가 신뢰하고, 존경해마지 않는 많은 벗들의 분노를 그 방증으로 생각한다. 그 분노에 관해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소득이 크진 않다.

2. 확증편향으로 왜곡된 페이스북의 공간은 이제 토론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것 같다. 이 글에 대한 조롱은 참을 수 있지만, 인격 자체를 공격하는 태도는 참기 어렵고, 이해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딱히 공격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든 그런 공격을 받을 이유는 없다. 그런 '인간감별사'의 천박한 조롱을 보면서 결심했다. 나는 누군가의 의견을 최대한 호의로 해석할 테다. 그리고 그 글이 천박하고, 그 의견이 비루하더라도 조롱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물론 인간은 천박하게 잔인한 동물이라서 그러기는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

3. 조롱이 이렇게 나쁜 건지 예전엔 미쳐 몰랐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까지 깨뜨린다. 그러니 조롱의 전략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아니, 성공할 수 없어야 한다.


from 민노씨.네 http://minoci.net/1374

2018년 7월 23일 월요일

안녕, 노회찬

노회찬이 언젠가 이런 말을 했던 거로 기억한다. 부정확하겠지만, 그 취지를 옮기면:

판결문을 보면 "피고인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공로를 고려해서"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주로 재벌들이 피고인인 사건에서 이런 표현이 상투적으로 나오죠. 그런데 노동자 피고인인 경우에는 이런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재벌 회장들만 국가 경제에 이바지했습니까. 노동자야말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착취당하면서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재벌 회장들이 횡령으로 배임으로 재판을 받으면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공로를 언급하는 판사들이 왜 집시법 위반, 쟁의법 위반으로 재판받는 노동자에게는 국가 경제에 이바지한 공로를 언급하지 않는 것입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는 노회찬이 좋았다.

그에게도 들키지 않은 비겁함이 있었을 테고, 그에게도 끝끝내 해결하지 못한 모순이 있었을 테다. 그런 인간적인 결핍이 그런 이율배반이 결국 스스로 자신을 처형하는 방식의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그의 죽음은 너무 무겁고, 그의 결핍은, 나는 그 무게를 잘 모르겠다.

지금 나에게, 그의 죽음은 너무나 부당하다. 더 더럽고, 더 저열하며, 훨씬 더 비루한 정치인을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다. 그들은 여전히 우리 위에서 군림한다. 무엇보다 전두환이 살아 있는 세계에서, 아니 전두환을 죽이지 못한 세계에서 정의의 무게는 얼마나 깃털 같은 것일까.

내 필명 '민노(씨)'는 2004년 총선의 '민주노동당' 이름에서 따왔다. 정확히 말하면, 초기 민주노동당에서 활약했던 노회찬의 모습을 보며, 그 2004년, 2005년 즈음의 민주노동당에서 따왔다. 그의 난중일기가 멋졌고, 언젠가 저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세상에 살고 싶었다. 그 세상에 눈곱만큼이라도 '민노씨'라는 내 또 다른 자아가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를 보내며, 노회찬이 내 필명에 이바지한 공로를 짧게나마 적는다.
정의는 흑백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고, 늘 회색의 세계에서 방황했다.
나는 여전히 노회찬을 정의로운 정치인이라고 생각한다.

안녕, 노회찬.


from 민노씨.네 http://minoci.net/1373

2016년 9월 5일 월요일

독자, 필자 그리고 편집자

편집자는 필자와 독자를 이어주는 가교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와 독자 사이에 놓인 그 너비와 깊이를 가늠하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저 같은 부족한 사람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때로는 징검다리를 놓는 일로 충분할 것 같기도 하고, 때로는 큰 강을 건널 나룻배가 되어야 할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그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필자(원고)를 있는 그대로 독자께 전하는 일이 편집자의 일이어야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슬로우뉴스는 다양한 철학과 지향을 가진 동인들의 협의체입니다. 슬로우뉴스 안에는, 비유하면, 뜨거운 물도 있고, 아주 차가운 물도 있습니다. 편집 방향과 색깔은 대개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이 섞여 미지근한 물이 되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독자들이 마시기에는 가장 적당한 온도의 물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시원함을 찾거나 뜨거움을 찾는 독자에게는 시원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물이었겠죠.
저는 최근 "관계: 너무나 베를린스러운 어떤 관계"라는 글을 편집했습니다. 초안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저는 뜨거운 물이었고, 또 어떤 편집위원은 차가운 물이었습니다. 초기 검토 과정을 거친 뒤에 제가 최종적으로 글을 편집하게 됐습니다. 두 부분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1. 하나는 글 서두에 나오는 "페이스북-혁명가"라는 조롱투 표현
2. 나머지 하나는 글 말미에 등장하는 "메갈"에 관한 논평이었습니다.
사전에 필자와 협의해 이 두 부분을 편집(이 경우에는 삭제)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는 원문 그대로 발행했고, 지금 와서 다시 숙고하면, 필자에게도 독자에게도 이롭지 않은, 필자와 독자의 간격을 더욱 멀어지게 한,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베를린스러운 어떤 관계"라는 글이 가지는 주된 가치를 한국사회의 문화적 편협함과 집단주의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타산지석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다소 도취적이고, 과도한 표현 혹은 민망하거나 독자에 따라서는 폭력적일 수 있는 표현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 역시 문화적 상대성과 다양성, 무엇보다 관용주의를 강조하는 테마의 글에서 필자의 개성으로 존중하려고 했고, 이를 가급적 살리려고 했습니다.
"베를린스러운 어떤 관계"를 비판하는, 현저히 눈에 보이는 독자들의 반응을 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즉시 편집팀원들과 대화했고, 비판을 주신 독자(슬로우뉴스필자이기도 한)와 대화했고, 또 무엇보다 글을 쓴 필자와 대화했습니다. 제가 신뢰하는 많은 이들께 조언을 구했고, 이 대화는 족히 10시간을 넘습니다. 결과적으로 슬로우뉴스 편집팀은 이 문제를 안건으로 올려 심도 있게 논의했고, 다음과 같은 '편집자 주'를 보강하는 선에서 독자의 비판적 지적에 답하기로 했습니다.
"이 글은 필자가 경험한 베를린의 문화적 다양성과 관용주의에 관해 서술한 글입니다.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을 표방한 몇몇 분들에게도 공감을 얻지 못하고 소수의견으로 매도됐던 필자의 경험 등이 그 맥락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최종 발행이 됐습니다. 앞으로 더 깊은 사유와 토론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이 글의 소재와 주제에 관한 반론과 보론, 비판 기고는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결과로만 보면 대여섯 줄의 편집자 주를 쓰기 위해 많은 분들께서 진심을 다해 고성이 오가고, 또 때로는 감정적인 불편을 느낄 정도로 대화했고, 토론했습니다. 그야말로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슬로우뉴스의 방법론이고, 철학이며, 필자와 독자를 모두 동등하게 존중하는 방식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글에 비판적인 독자 입장에서는 아쉬운 대응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쉬움은 다양한 "반론 기고"로 풀어주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는 "베를린스러운 어떤 관계"를 쓴 필자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위대한 정신은 숭배받기보다는 비판받기를 원한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물론 순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사랑받고, 칭찬받기를 원합니다. 따뜻하게 안아주길 바라고,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누군가 내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저도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때론 치열하게 비판하고, 반대하며, 분노하는 것이야말로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양한 대화가 담기고, 누구나 자신의 체험을 당사자로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 많이 배우고, 못 배우고를 떠나,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그저 나로서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공간. 그런 집단 지성의 정원으로 슬로우뉴스가 자리하기를 바랍니다.
긴 넋두리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슬로우뉴스 편집장 민노

*메모. 슬로우뉴스 페이스북 페이지(2016년 7월 21일)에 쓴 글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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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9일 토요일

마음빵 돈빵 몸빵

1. 마음빵: 이성복 식으로 말하면 "무력한 기도의 방식"이랄까. 형태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대개의 경우에 무익하거나 영향력이 전혀 없다. 다만 마음이 없다면 몸이 움직이지 않으니 무시할수만은 없는 노릇. 그리고 마음이 없는 몸은 강요 혹은 가식이라서 지속하기 어렵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만났다

버리고 버림받았다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손 잡고 입 맞추고 여러 번 죽고 여러 번

태어났다

흐르는 물을 흐르게 하고 헌 옷을

좀 먹게 하는 기도, 완벽하고 무력한 기도의

형식으로 나는 숨 쉬고 숨졌다

지금 내 숨가쁜 시신을 밝히는 촛불

애인들, 지금도 불 밝은 몇몇의 술집

내 살아 있는 어느 날, 어느 길, 어느 골목에서

너를 만날지 모르고 만나도 내 눈길을 너는 피할 테지만

그 날, 기울던 햇살, 감긴 눈, 긴 속눈썹, 벌어진 입술,

캄캄하게 낙엽 구르는 소리, 나는 듣는다


- 이성복, “연애에 대하여” 중에서





마음빵의 유사 대체재: 온라인에서 아주 아주 간단한 수동적인 의견 보태기 혹은 SNS에서의 공유... 이들이 대체로 지적 만족/정의감의 알리바이 역할을 한다는 지적은 대체로 현재의 소셜미디어 환경에서는 아주 유의해서 고찰해야 하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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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돈빵: 대개 몸빵의 대체재로서 큰 효과가 있다.



3. 몸빵: 믿음 소망 사랑 중에 그 중 제일은 사랑이라.... 마음빵 돈빵 몸빵 중에 그 중 제일은 몸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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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0일 목요일

선입견, 요나 그리고 익명성

1.

선입견은 고정관념이다. 어떤 대상에 관하여 이미 마음 속으로 품고 있는 정형화한 생각을 선입견 혹은 선입관이라고 한다. 편견은 '공정하지 못함', '한 편에 치우신 생각'이라는 의미를 품는다는 점에서 선입견과는 다르다. 이 둘은 하나의 마음 속에 머물러 서로 겹치기도 하지만, 의미론적으론 서로 다른 영토에 속한다.



가령, 비싼 외제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는 어떤 이쁜 여자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어떤 배나온 중년 아저씨를 우리가 어느 날 어느 거리에서 바라본다면, 그 여자와 남자는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이 만든 거대한 덫에서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다.



2.

우리는 이미 98%쯤은 결정된 존재다. 우리는 선입견의 포로다. 이건 거의 확정적이다. 어떤 A라는 사람을 B라는 사람과 달리 평가할 수 있는, 다르게 느낄 수 있게 하는 거의 모든 요소는 A 혹은 B와는 상관없이 이미 결정된 것들이다.



그들이 태어난 나라, 그들의 피부색, 그들이 태어난 시기, 그들이 자라온 곳, 그들의 부모와 형제, 그들이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지능과 체력. 그들의 눈동자와 눈썹, 머리카락. 이건 그들(A와 B)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들은 선택할 수 없고, 그들의 의지와 실천으로 하나도 바꿀 수 없는 것들이다. (의느님이라면? 아, 의느님이야말로 창조주시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이 좆같은 나라에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알아? 나는 무슨 원빈처럼 안 생기고 싶어서 이렇게 생긴 줄 알아?



3.

이렇게 선입견의 포로에 불과한 인간이라는 존재에게는 그렇지만 기적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했다. 그리고 상상한다. 나는 나 아니라니깐. 그 자기 부정은 자기를 둘러싼 결정된 것들을 깨뜨린다. 나는 나 아니고, 우리 부모는 우리 부모가 아니고, 내 형제자매는 내 형제자매가 아니다. 나는 사실은 저 부자집의 숨겨진 자식 혹은 외계에서 온 수퍼히어로일거야. 그 거짓말을 사람들은 소설, 이야기, 픽션이라고 부른다.



바슐라르는 소설의 기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나 아닌데, 정말 이상하게도 나이어서, 나는 나 아닌 것들을 상상하고, 그 상상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들의 나라에서 나는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바슐라르는 그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순간들을 성서 속 인물인 '요나'에 비유해 소설의 기원을 '요나 컴플렉스'로 설명한다.



4.

누군가과 존재와 존재로서 만난다는 건 그래서 불가능하다. 그 존재를 전인격적인 실존이라고 말한다면 만남의 불가능성 역시 확정적이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우리는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 이미 결정된 존재들이고, 그렇게 이미 거의 전부가 이미 만들어져서 온갖 선입견의 덫들에 걸려 버린 불쌍한 짐승에 불과하다.



5.

그래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가 진실로서,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한 전인격적인 존재로서 만날 수 있는 건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다. 불을 끄고,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그 눈동자를 그 피부색을 그 머리카락과 그 성별을 그 목소리를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곳. 그 곳에서 우리는 겨우 겨우 스스로의 존재에 관해 조금은 솔직하게 그 선입견의 그물로부터 벗어나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6.

그런 완벽한 어둠에 가장 가까운 '요나의 바다', 미디어적으로 그 요나의 바다에 가장 가까운 게 블로그였다. 선입견 가득한 존재가 스스로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가장 실현 가능한 공간은 인터넷이었으니까. 거기에선 누구나 쉽게 하나의 새로운 이름(아이디)를 통해 전자전기신호들을 공평하게 부여받을 수 있었으니까. 블로그의 익명성은 그래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요나들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익명의 깊은 어둠 속에서야말로 우리는 자기 존재를 투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7.

물론 여기에는 언어적인 한계가 자리한다. 그리고 언어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면서, 그 자체로 토대이므로(상부구조가 아니라), 한 존재를 다시 규정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런 한계를 인정하더라도 20세기 말에 남한에서 태어난 인간이라는 동물이 그 동물성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인터넷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월드와이드웹, 특히 협의의 미디어로서 블로그였다.



8.

블로그라는 요나의 바다에서 우리는 새로 태어났다. 하지만 비극적으로 그 시기는 짧았다. 그 안에서도 다시 계급이 생겨나고, 또 다시 장사꾼의 호객행위가 생겨났으며, 병신 같은 일등놀이가 태어났다. 그건 인간이라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고, 동시에 희극적인 존재가 스스로의 불안과 한계를 잊는 방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건 참 자기연민에 빠지게 하는 인간의 속성이긴 하다. 참으로, 참으로 안쓰럽도다.



9.

글이 인격을 반영한다면, 동시에 그 인격의 기만 역시 반영한다. 글이 진실을 반영한다면, 그 진실이 숨어 있는 거짓 역시 반영한다. 사람들은 흔히 익명성을 거짓, 어둠, 투명하지 못한 어떤 것의 이미지로 떠올린다. 그건 마치 현실 속의 대한민국이라는 껍데기, 그 표시, 그 투명함, 그 물질성이 갖는 기만과 거짓의 알리바이 같다.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와 경제와 권력의 거짓은 익명의 가치를 불길하고, 음산하며, 타락한 존재의 조건으로 이미지화했다(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본능에 가까운 욕망으로 언술화했다).



0.

얼굴. 내가 원래 말하고 싶었던 건 얼굴이다. 얼굴만큼 기만적인 선입견의 도구는 없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원하는 얼굴로 태어나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다. 그런데 위대한 대한민국은 가면(익명성)을 거짓으로 선포한다. 얼굴이야 말로 거짓이다. 이건 정말 확정적으로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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