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 Time Ago in Apple] 시리즈는 현재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리고 있는 애플 리사전을 다녀오고, 거기서 촬영한 사진을 기반으로 쓰는 시리즈입니다. 전시회에 출품된 제품 중 몇 점을 뽑아 다룹니다.
우리는 애플 컴퓨터라고 하면 바로 매킨토시(Macintosh), 혹은 “맥(Mac)”을 떠오른다. 애플을 좀 더 안다면 예전의 애플 I이나 애플 II도 알 것이다. 하지만 맥이 출시되기 직전, 애플은 애플 II를 벗어난 새로운 도박을 시작했다가 완벽한 실패를 맛봤다. 그것이 바로 리사다.
기원
1976년에 애플의 설립과 발매한 애플 I 이후, 1977년에 출시된 애플 II는 엄청난 속도로 팔려나갔다. 77년에 2,500대를 판매했지만, 1981년에는 21만 대를 판매했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는 애플 II가 마음에 들진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애플 II가 애플을 같이 창업한 스티브 워즈니악의 작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잡스는 자신만의 제품을 원했다.
* 애플 III.
애플 II의 후속으로 내놓았던 애플 III가 깔끔하게 망하고, 그 이후에 시작한 것이 바로 리사(Lisa) 프로젝트였다. 이 이름을 지은 사람은 잡스였는데, 개발팀은 여기에 “지역적으로 통합된 소프트웨어 아키텍처(Local Integrated Software Architecture)”라는 기나길면서 대체 무슨 의미인지 알 수도 없는 풀이를 달아놓았다. 물론 개발팀 내에서는 그 이름이 당시 잡스가 자신의 딸이라고 인정하고 있지 않았던 사생아 리사 브레넌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라는 추측을 했다. “죄책감에서 지은 것일지도 몰라요.”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잡스는 당시에는 부인했지만, 결국 리사를 자신의 딸로 인정한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물론 제 딸 이름에서 따왔죠”라며 인정했다.
처음에 리사는 2,000달러 대의 16비트 프로세서가 탑재된 컴퓨터로 기획됐다. (애플 II는 8비트였다) 처음에는 애플 II가 그랬던 것처럼 텍스트 기반의 인터페이스를 채택했지만, 잡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1979년의 어느 날, 제록스의 팔로 알토 연구 센터, 즉 제록스 PARC(Palo Alto Research Center)를 방문한 잡스는 그곳에서 해답을 보게 된다. 바로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 즉 GUI였다. UI를 텍스트가 아닌 비트맵 기반으로 생각하면서 단순한 구조에서 벗어나 더 화려한 그래픽이나 서체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화려함도 화려함이었지만, 그만큼 UI를 더 접근하기 쉽도록 해준다는 장점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10~20대라면 GUI가 없는 컴퓨터라면 조작도 못 할 정도가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GUI는 아무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혁신이었다.
* 제록스가 PARC에서 개발한 GUI를 처음으로 활용한 상용 제품 제록스 스타. 하지만 망했다.
100만 달러 상당의 애플 주식(애플은 아직 상장하기 전이었다. 상장 후 이 보유분은 1,760만 달러로 불어난다)을 제록스에게 넘기고 나서 PARC의 작품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잡스는 이 엄청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제록스는 사실 GUI에 기반한 컴퓨터인 “스타”를 내놓은 적이 있지만, GUI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설계와 무지막지하게 비싼 가격으로 보기 좋게 말아먹었다)에 분노하며 리사에 GUI를 적용하기로 했다. (이때 인용된 말이 바로 피카소가 말했다는 그 유명한 “좋은 화가는 베끼지만, 위대한 아티스트는 훔친다”였다) 그리고 제록스에서 일하던 두 명의 엔지니어를 애플에 데리고 와 리사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재밌는 사실은, 이때 데려온 엔지니어 중 한 명인 래리 테슬러의 딸 이름도 리사였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잡스는 엄밀히 말해 리사 개발의 총괄이 아니었다. HP에서 일한 적 있는 엔지니어 존 카우치가 리사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었다. 하지만 잡스는 그를 무시하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직접 리사의 개발팀에게 주입시켰다. 카우치가 좋아할 리가 없었고, 갈등은 깊어졌다. 결국 잡스의 행동에 제동을 걸어야겠다 생각한 애플의 상층부는 잡스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해버렸다. 그렇게 그는 자신의 딸 이름을 붙인 제품 프로젝트에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자신의 영향력을 다시금 끼칠 수 있는 개발팀을 찾아다녔는데, 그렇게 해서 찾은 곳이 바로 매킨토시 팀이었다.
그렇게 발표된 리사는...
* 1983년에 출시된 1세대 리사. 두 개의 트위기 드라이브로 1세대 제품임을 알 수 있다.
리사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83년 1월에 첫 선을 보였다. 제록스 PARC에서 GUI를 처음으로 시연받고 나서 4년 가까이 흐른 후였다. 리사는 5MHz 짜리 모토로라 68000 (줄여서 68K) 프로세서에, 당시로서는 넉넉한(?) 1MB RAM을 장착했다. (1년 뒤에 나온 매킨토시의 메모리는 고작 128KB였다) 저장장치는 내부적으로 “트위기(Twiggy)”라 불렀던 두 개의 5.25인치짜리 애플 파일웨어 플로피 드라이브(각 871KB짜리)를 썼다. 리사의 내부는 모듈형으로 제작돼 있어 뜯기도 쉬웠고, 안의 부품을 업그레이드하기도 쉬웠다. 그 덕분에 이후에도 확장 부품이 많이 나올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잡스의 고집에 따라 완전한 폐쇄형 디자인을 추구했던 매킨토시와 가장 큰 차이점을 보인 부분이었다.
“리사 오피스 시스템”이라 불리는 운영체제도 완전히 새로웠다. GUI를 활용한 것은 물론이고, 선점식 멀티태스킹과 메모리 보호 기능을 도입했다. 특히 메모리 보호는 2001년에 Mac OS X(현 macOS)에 와서야 맥에 적용됐을 정도로 앞선 기능이었다.
하지만 리사는 시작부터 입지가 불안정했다. 결론적으로, 잡스가 문제였다. 상술했듯이 잡스는 리사 팀에서 쫓겨나 매킨토시 팀을 이끌기 시작했는데, 이때 리사 팀과 경쟁이 붙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쟁심은 먼저 나온 리사에게는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다.
하드웨어적인 문제부터 살펴보자. 비트맵 기반의 리사 오피스 시스템은 당연히 텍스트 기반의 운영체제보다 성능을 더 잡아 먹었는데, 리사의 5MHz 68K 프로세서는 애플 II보다 훨씬 앞선 녀석이었음에도 리사 오피스 시스템을 돌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거기다 OS를 저장한 트위기 드라이브도 속도가 느렸으며, 신뢰성도 별로 좋지 않았다. 다음 해에 나온 매킨토시가 8MHz 짜리 68K 프로세서를 쓴 것을 보면 이 문제는 자명했다. (대신 메모리가 고작 128KB였던 맥은 메모리 문제에 시달렸지만)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가격. 리사는 원래 2,000달러 대의 가격을 목표로 개발하기 시작했지만, 잦은 지연과 하드웨어 교체로 양산 제품의 가격은 무려 9,995달러까지 치솟았다. 이 가격은 웬만한 차 한 대와 맞먹었다. (2017년으로 치면 약 24,700달러, 즉 2,833만 원 정도다) 이 문제는 이듬해 나온 매킨토시가 1/4 수준인 2,495달러로 나오면서 리사의 관짝에 못을 박는 격이 됐다. (그렇다고 이 가격도 저렴한 건 아니었다. 2017년 기준으로 약 708만 원이었으니) 거기에 맥의 운영체제는 리사와 전혀 호환되지 않는다는 치명적 문제도 있었다. 개발 기간 동안 잡스에 의해 촉발된 사내 경쟁의 결과였다.
* 이듬해 발표된 리사 2는 트위기 드라이브를 소니의 3.5인치 플로피 드라이브로 교체했다.
이듬해인 1984년, 매킨토시와 함께 1세대 리사의 문제를 고치려 노력한 리사 2가 데뷔했다. 리사 2는 기존의 파일웨어 플로피 드라이브를 맥에도 들어간 소니의 3.5인치 플로피 드라이브로 바꿨고, 10MB의 하드 디스크를 옵션으로 달 수 있었다. 그리고 가격이 3,495달러로 확 떨어졌다. 애플은 1세대 리사를 산 고객 전부에게 리사 2 사양으로 무료로 업그레이드해주기도 했다. 기존의 트위기 드라이브 대신 소니 드라이브를 설치하고, 부트 롬과 I/O 롬을 바꿔주는 작업이었다. 어떻게 보면 세 배 가까이 더 내고 1세대 모델을 산 사람들이니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방책도 리사의 단종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애플은 1985년에 맥의 운영체제를 에뮬레이션 할 수 있는 새로운 리사를 매킨토시 XL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았지만, 이마저도 얼마 못 가 매킨토시 플러스의 등장과 함께 단종됐다. 이때까지 2년 넘는 기간 동안 애플은 약 10만 대 정도의 리사를 판매했다. 이에 반해 역시 성공했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맥조차도 출시 후 첫 3개월 동안 7만 대가 팔렸다.
GUI의 시대를 연 컴퓨터
이렇게 리사는 애플로서는 당시 역사상 최대의 실패로 기록된다. 리사를 개발하는데 무려 5천만 달러를 쏟아부은 것을 생각하면 뼈아팠다. 또한, 과도한 사내 경쟁이 리사의 실패 요인 중 하나로 지목되면서 훗날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난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하지만 리사는 개인용 컴퓨터의 판도를 바꾸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물론 GUI를 처음으로 상용화시킨 건 제록스 스타였고, 그걸 대중화시켰던 건 맥이었지만, 리사는 이 개념을 처음으로 대중에게 선보였다. 이렇게 GUI는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섰고, 이후 Mac OS뿐만 아니라 자극을 받은 경쟁사 마이크로소프트에게도 영향을 줬다. 그렇게 등장한 것이 윈도우였다.
* GUI를 활용하기 위해 등장한 마우스는 매킨토시의 것과 거의 동일했다.
* 리사의 키보드를 뜯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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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쿠도군 (KudoKun) 컴퓨터 공학과 출신이지만 글쓰기가 더 편한 변종입니다. 더기어의 인턴 기자로 활동했었으며, KudoCast의 호스트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
참고
• 월터 아이작슨, <스티브 잡스>
• Apple Lisa - Mac History
촬영협조: 애플 리사전 (DD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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