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3일 월요일

그냥 다 죽어버리면 좋겠어

0. 한쪽에선 정의를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예의를 말한다.

1. 한쪽에선 죽음으로 도피했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죽음으로 사죄했다고 말한다.

2. 한쪽에선 고소인의 고통을 보라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자신이 지은 죄보다 더 무거운 처벌을 자기 자신에게 집행한 불완전한 인간을 보라고 말한다.

3. 한쪽에선 오랫동안 반복적으로 한 연약한 존재를 억눌렀던 위선적 권력의 일방적인 욕망과 탐욕이 만들어낸 고통을 보라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그 모든 고통은 그 고통을 만들어낸 자가 스스로 처단한 생명으로, 그 죽음으로 넉넉하게 보상받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4. 한쪽에선 사실을 규명하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생명이 줄 수 있는 마지막 참회, 죽음으로 이미 사실을 뛰어 넘는 진실이 성취됐다고 말한다.

5. 한쪽에선 죽음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른 한쪽에선 죽음은 이미 모든 것을 말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가 살아 돌아오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죽음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가 죽음으로 걸어들어간 그 시간을 함께 했다.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그 어둠으로 걸어 들어간 그 몇 시간 동안, 나는 그의 죽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했다. 만약에  그에게 좀 더 연민을 느낀다면, 그가 스스로 걸어 들어간 그 죽음의 시간을 실시간으로, 간접적으로나마, 함께 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 죽음의 시간을 한 방송사의 특보를 통해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하지만 고소인 혹은 피해 호소자의 고통을 상상하는 일은 나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의 남자들은 물론이고, 적지 않은 여성들에게도 그럴 것이다. 내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간접체험했던 그 죽음의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어둠고 깊은 고통을 고소인이 체험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을 간접체험하는 사람들은 남성보다는 여성일 테고, 앞으로도 그 고통의 시간은 누군가에게는 계속 이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그 죽음조차 도피로 규정하면서 망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만 생각할 뿐이다. 다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 그저 그 죽음 앞에서 아주 잠시 동안만 침묵할 수는 있지 않을까, 바라볼 뿐이다.

나는 죽음마저도 서로 더 증오하기 위해 도구로 쓰는 이 지옥도를 더는 쳐다볼 자신이 없다.
정말 더는 보고 싶지 않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는 조두순이고, 손정우이며, N번방의 공범들과 별로 다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렇게 상상할 수 있는 조건이나 능력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죄와 벌 사이에는 아주 엄격한 비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 지은 만큼 벌 받아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벌 받은 만큼 용서받을 자격도 생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 그건 단지 성인지 감수성의 부족일 뿐이다.
그 어떤 사람들의 말이 나에겐 그냥 논리의 비약이거나 억지인 것처럼.

그러다가 그냥 모두 용서하면 좋을 텐데, 나는 문득 생각한다.
그냥 모두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면 좋을 텐데.....
하지만 그런 멍청하고 정의롭지 않은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벌어져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건 정의롭지 못한 일이니까.
나도 조두순을 손정우를 N번방의 공범들을 용서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들이 스스로 죽어버렸다면, 아마도 용서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그 피해자였다면 혹은 적어도 그 피해자가 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면.
그건 관념으로 상상하거나 떠올려보는 것만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음 한 편으로 나는 생각한다.
빌어먹을, 이럴 거면 그냥 다 죽어버리면 좋겠어.
그래, 그냥 다 죽어버리면 좋겠어.

그리고 다 죽어버리기 전에,
조금만 더 서로에게 따뜻하게 말할 수 있다면 좋겠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from 민노씨.네 http://minoci.net/1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