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7일 월요일

독백 (미완성)

'미투'라는 격변의 시대, 혁명의 시대를 사는 진보적 지식인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안희정 1심 판결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세계관, 가치관은 '당대의 법적 판단'의 가치보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보면 더 중대한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안희정 1심 판결에 관해 분노하는 많은 이들을 존경하고, 그 마음에 공감한다.

다만, 판결의 결과는 현재 법 체계의 한계를 반영한 것일 뿐이라고 판단한다. 안희정 판결을 담당한 형사재판부 판사들이 세상에 둘도 없는 꼰대라서, 가부장 기득권이라서 이런 판결을 내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형사법의 체계와 이 사건에 드러난 핵심 사실 관계로 미뤄 보건대, 확률적으로 무죄 판결을 내릴 판사가 그렇지 않을 판사보다 더 많다고 여긴다. 그러니 그것은 사람(판사)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형사법)의 문제다.

그렇다면 이 시스템은 즉각 폐기되어야 하는가. 앞으로 우리 공동체가 자신의 생존과 미래와 가치를 위해 확보해야 할 진보적 가치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러니 촛불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고, 적폐의 연장이므로 안희정 판결과 이 판결을 도출한 형사법의 원칙(특히 형사법에서 입증책임의 문제)이 그 즉시 폐기되어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안희정 유죄, 법원도 유죄'를 외치는 '정의로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우리들'은 누가봐도 정의롭다. 나는 그 뜨거운 심장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내 마음도 당연히 그쪽을 향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안희정에게 무죄를 선고한 그들은 그런 이유로 불의한가. 무죄 판결이 도출될 수밖에 없는 현존하는 대한민국의 형사사법체계는 불의한가.

'위계/위력 간음'에서 그 위력의 관계만으로 범죄를 의제하고, 그에 관한 반증을 제시해 혐의를 벗는 의무를 피고인에 부여하면 어떻게 될까.

안희정-김지은에 대입해보자. 안희정과 김지은은 그 자체로 '위력'이 인정되는 관계이므로 '성관계'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일단 안희정은 '위계/위력 간음'을 저지른 범죄자가 된다. 그가 그 혐의를 벗으려면 해당 성관계가 '위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반증을 통해 입증해야 한다.

그런데 원래 형사법에서 입증책임은 당연히 어떤 자가 죄를 지었다고 공소를 제기하는 검찰에 있다. 주장하는 자가 입증하라. 이 대원칙을 '위계/위력 간음'에서만은 예외로 해야 할까. 그 입증책임을 '현저히' 완화(정확히는 '전환')해도 좋은 걸까. 그 입증책임의 방향을 정반대로 바꿔도 좋은가.

안희정과 같은 거대한 권력자는 충분히 실력(?) 있는 변호인단을 꾸릴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돈 많은 사장님, 대기업 간부, 소위 이런저런 권력자들, 기득권자들도 그럴 테다. 하지만 그런 자들만 피고인이 되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중에 억울한 자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자들에게도 인권은 있다. 인권은 상대적이지 않고 보편적이다. 착한 사람에게도 악한 자에게도 모두 동등하게 있는 것. 그게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지는 권리, 인권이다. 형사법(특히 핵심인 죄형법정주의와 무죄추정의원칙)이 괜히 범죄자의 마그나 카르타(권리장전)라는 별칭을 얻는 게 아니다.

검찰은 사법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국민의 막대한 세금을 빨아먹는 거대한 권력기구다. 검사는 국민을 대신해서 공동체의 '정의'를 실현하는 존재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 피의자의 죄를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세운다. 그리고 그 자가 저지른 죄를 '엄격하게' 입증한다. 그게 원칙이다.

그런데 '위계/위력 간음'이라는 범죄에 관해서만은 그 원칙이 파괴된다. 검찰의 입증책임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완화'된다. 검찰은 할 일이 별로 없다. 위력 관계만 인정되면 그 즉시 범죄는 기수가 되므로, 검찰은 피고인의 '반증'에만 대응하면 그뿐이다.

이것은 정의인가. 나는 이것이 국가권력 그 자체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저 거대한 검찰기구에 맞서야 하는 한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현저한 무기평등의 파괴라고 생각한다.

형사 재판은 아무리 진보적으로 고찰해도, 기본에서 한 개인과 거대한 권력적 국가기구(검찰)와의 싸움이다. 그 개인이 천하의 개새끼라고 해도, 엄청난 돈과 권력을 가진 이라고 해도, 그런 예외적인 케이스 때문에 형사법의 체계와 근간을 형성하는 대원칙에 예외를 두고 손쉽게 변경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형사법과 같은 공권력 수단은 항상 그런 공권력으로부터 파괴되었던 '피의 기억'을 가진 시민에게는 '양날의 검'일 수밖에 없다. 그 검은 '좋은 시절'에는 나쁜 놈을 처단할 수도 있지만, '흐린 날'에는 우리 자신을 향하는 추악한 권력의 비수가 될 수도 있다. 다시 현실로 돌아가보자.

안희정을 법적으로 처벌해야 하는가? 처벌할 수 있는가?

1. 그러면 좋겠다. 2. 그럴 수 없다.

안희정 1심 재판의 결론은 (아직은) 2번, "(법적 증명이 부족해) 그럴 수 없다"이다. 정의는 고정된 단단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철학과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설정한 놓은 일시적인 '정치노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자기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자기최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가령, 정의의 반대말인 전두환의 민주"정의"당의 기치는 "정의사회구현"이었다. 물론 절대적인 정의가 있는지 있을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따로 생각해볼 문제지만, 현실에서 정의는 대체로 맥락적이고, 상대적이다. 내 정의가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네 정의는 반드시 틀린 것이 아니라 (대체로) 내 정의가 옳아도 (동시에 상대적으로) 네 정의가 더 (혹은 덜) 정의로운 것이기도 하다.

각설하고, 판결문(정확히는 민주신문의 한 기자가 불완전한 형태로 받아적기한 글)을 읽어봐도 판결의 논리를 정면에서 반박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판결의 논리 중에서 크게 문제되는 부분이 무엇인지 아시는 분은 설명을 부탁). 내가 생각하는 혹은 믿는 정의에 반하므로 판결이 부당하다는 '마음'은 십분 이해하지만, 판결 역시 현존하는 '죄형법정주의'와 '형사법의 입증원칙'이라는 정의에 충실한 것으로 보인다.

증명되지 않은 피의사실을 정의에 관한 주관적인 믿음 때문에 '범죄'로 의제할 수는 없다. 이것은 형사법의 대원칙인 죄형법정주의를 폐기하자는 것에 다름 아니다. 죄형법정주의가 정면에서 폐기된 두 번의 큰 역사가 있다. 히틀러의 독일과 초기 소비에트다.

"건전한 국민 정서에 반하는 행위는 처벌할 수 있다." (독일 형법 2조)

일견 상식적으로 보이는 이 문장은 풀어서 설명하면, 권력이 국민의 '정의'(건전한 국민 정서)를 참칭해 누구나 가두고, 죽일 수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국민의 절대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것으로 당시엔 믿어졌던 독일 정부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법은, 특히 국민을 가두고, 빼앗고, 죽일 수 있는 형사법은 '좋은 시절'이 아니라 '흐린 날'을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고쳐져야 한다. 그것은 추악한 범죄자를 처벌하지 말자는 아니라, 언젠가 추악한 권력을 만나 우리를 향할 수도 있는 그 '양날의 검'을 대비해야 한다는 전략적인 고려이기도 하다.

나는 솔직히 이렇게 말하는 내가 믿어지지 않는다. 가진 것도 더럽게 없는데 기득권의 논리만 설파하는 더러운 꼰대 새끼, 그게 나인가. 아마도 정의로운 누군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 테다. 나는 그 정의로운 마음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나를 욕하는 정의로운 마음이 흐르고 넘치길 진심으로 원한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는 상관 없이, 내 심장은 어느새 차가워졌다. 내 심장은 회의주의와 패배주의를 만나 초라하게 식어버렸다. 볼품없이 쪼그라졌다. 그런 내가 나도 정말 싫다.

뜨거운 심장은 아름답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심장은 너무 빨리, 너무 쉽게 식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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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0. 기록을 위해 옮긴다. 앞으로 페북에는 가급적 글을 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1. 이 글은 미완성이다. 나는 '안희정 판결'에 대해 분노하는 여성들을 이해하려고 애썼지만, 그 노력이 턱 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 글에 대한, 내가 신뢰하고, 존경해마지 않는 많은 벗들의 분노를 그 방증으로 생각한다. 그 분노에 관해 좀 더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소득이 크진 않다.

2. 확증편향으로 왜곡된 페이스북의 공간은 이제 토론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것 같다. 이 글에 대한 조롱은 참을 수 있지만, 인격 자체를 공격하는 태도는 참기 어렵고, 이해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딱히 공격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누구든 그런 공격을 받을 이유는 없다. 그런 '인간감별사'의 천박한 조롱을 보면서 결심했다. 나는 누군가의 의견을 최대한 호의로 해석할 테다. 그리고 그 글이 천박하고, 그 의견이 비루하더라도 조롱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물론 인간은 천박하게 잔인한 동물이라서 그러기는 쉽지 않을 거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

3. 조롱이 이렇게 나쁜 건지 예전엔 미쳐 몰랐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믿음까지 깨뜨린다. 그러니 조롱의 전략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아니, 성공할 수 없어야 한다.


from 민노씨.네 http://minoci.net/1374